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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차, 감개무량

by 다3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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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컨텐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부모님은 좋아하진 않지만 괜히 더 지금 나가야한다고 어필하곤 했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나는 곧 다시 떠날 것 같긴 하다.

오늘 우연히 한국어 공부를 희망하는 프랑스인들이 모인 곳에 들어갔다. 놀라웠다. 내 예상보다 한국어 공부를 하는 이들이 정말 많다. 같이 공부하자며 요청이 끊이질 않아 답을 다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감개무량이라는 말만 되풀이 한다.

나의 해외 경험은 인종차별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영어를 아예 못했지만 억울하고 화나서 교포친구를 통역으로 중간에 세워두고 백인 여자애 2명과 싸운 기억이 강렬하다. 초등학생들이라 지금 생각하면 귀여운 정도지만, 그 당시엔 필사적이었다. 한국인으로써의 꽤나 진지한 전투였다.

몇년 뒤 캐나다에서의 1년은 철저한 아싸의 시간이었다. 크게 주체적으로 영어 공부에 대한 흥미가 있지도 않았어서 그냥 잘 먹고 잘 쉬었다, 아싸로써. 내 귀를 뚫어준건 캐나다 학교 친구들이 아니라 내 방에 있던 작은 텔레비전이었다.

대학생 때, 바라고 열심히 준비해서 미국으로 인턴십을 갔다.
월트 디즈니 월드라는 꿈의 공간이었지만, 실상은 비행기를 2번이나 갈아타고 가야하는 작은 올랜도 시골 마을이었다. 세계 대학생 인턴십이라 좋은 사람들이 물론 많았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뉴욕에 가면 당연히 한국을 알지만, 지방 소도시 출신 미국인들은 우리나라의 존재를 낯설어 했다. 우리를 아직도 전쟁 중인 가난한 이미지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이런 질문도 들었다.
한국에도 담배 있어? 피자 있어? 이런거 먹어봤어?
나름 공부 잘하는 학교에서도 소수로 뽑힌 학생들인데, 전쟁 고아 보듯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이땐 주로 미국 유럽쪽 보다 페루, 멕시코, 중국 친구들과 친했다.

2년 후,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갔다. 역시나 파리는 아니고 근처 디종이라는 소도시였다. 축구 경기를 보고 나오는데, 한국어가 퍼져 울렸다.
오빤 강남 스타일~
이 작은 도시 2부 리그 축구장에서 한국어가 나오다니 울컥했다. 심지어 사람들이 모여 강남 스타일 춤을 추기도 했다. 싸이한테 정말 감사했다. 당시에 삼성을 일본 브랜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인식시켜준 첫번째 사례가 아니었나 싶다. 유쾌한 방식이라 더 좋았다. 이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여겼다. 주류 문화에 드디어 들어간 사례가 생긴 것이다.

6년전쯤 파리에서 한국어를 배울 학생을 찾은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노력 끝에 2명과 공부할 수 있었다. 이 마저도 단지 한국인 아시아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서 수업이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런데 불과 몇년만에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질 수가 있을까. 아직도 믿기 어렵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연락을 한다. 2-30대가 대부분이다. 심지어는 17살도 봤다.
이야기해보면 K 드라마와 BTS의 영향이 컸다. 특히 BTS를 특정해 말하는 사람보다 드라마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감개무량하다.

대화한 한 프랑스 여자인 친구는 아예 한국에 이민 와서 살고 싶다고 했다. 나도 프랑스 비자를 원한다고 하니, 여권을 바꾸자는 농담까지 나눴다.
이게 진정 현실이 맞는 것인가.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관심이 넘쳐서 빨리 프랑스로 가고 싶어졌다. 실제 현지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
이런 분위기라면 한국인에 대한 높아진 인지도로 노동청에서 한국인에게 노동비자를 조금 더 내주지 않을까 기대도 해본다.

벌써 설렌다.
불어가 다시 내 취미 리스트에 올라간다.
격양되어 잠이 안오는 밤이다. 참 기분 좋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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